부와이흐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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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와이흐 왕조는 10세기 초 이란 북서부에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부와이흐 가문의 세 형제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들은 파르스, 지바르,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으며, 특히 무이즈 앗다울라가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대 아미르로 임명되면서 이라크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부와이흐 왕조는 이란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며 번영을 누렸으나, 왕족 간의 권력 다툼과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11세기 중반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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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이흐 왕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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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Âl-i Būya}} |
기타 표기 | or Buwayhids etc. |al-Buwayhiyyah}}}} |
통치 민족 | ; ; ; ; ; ; ; .}} |
존속 기간 | 934년 - 10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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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시라즈(파르스 부와이흐, 934년–1062년) 레이(자발 부와이흐, 943년–1029년) 바그다드(이라크 부와이흐, 945년–1055년) |
사용 언어 | 아랍어(공식 및 궁정 언어, 링구아 프랑카) 중세 페르시아어(제2 궁정 언어) 신 페르시아어(대중적, 문학) 다일람어(통치 왕조) |
종교 | 시아 이슬람(왕조) 수니 이슬람(다수)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유대교 |
통화 | 디르함, 디나르 |
정치 | |
정치 체제 | 세습 군주제 |
칭호 | 에미르, 샤한샤 |
역사 | |
주요 사건 | 이마드 알다울라가 에미르로 선포 (934년) 아두드 알다울라가 부와이흐 왕조의 최고 통치자가 됨 (979년) |
통치자 | |
초대 통치자 | 이마드 알다울라(934년–949년) |
마지막 통치자 | 아부 만수르 풀라드 스툰(1048년–1062년) |
이전 | |
이전 국가 | 압바스 왕조 지야르 왕조 바누 일야스 아부 압달라 알바리디 |
이후 | |
이후 국가 | 가즈나 왕조 셀주크 제국 카쿠이드 왕조 우카일리 왕조 마르완 왕조 (디야르 바크르)마르완 왕조 샤반카라 바누 마즈야드 안나즈 왕조 |
통계 | |
추정 면적 (980년) | 1,600,000 km2 |
2. 역사
카스피해 남안의 산악 지대 데이람 출신의 호족으로, 시아파의 일파인 12이맘파를 숭상하는 부와이흐 가문이 세웠다. 부와이흐 가문의 표기는 페르시아어식으로 부야(Būya)라고 읽기도 하여 '''부야 왕조'''라고도 한다.
부와이흐 왕조는 부와이흐(부야)의 세 아들인 알리, 하산, 아흐마드 형제가 10세기 전반 다일람인 군인으로 활동하며 지야르 왕조 아래에서 세력을 키우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곧 지야르 왕조로부터 독립하여, 장남 알리(이마드 앗다울라)는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 차남 하산(루크 앗다울라)은 북서부 지발 지방, 삼남 아흐마드(무이즈 앗다울라)는 처음에는 동쪽의 케르만 지방을 중심으로 각자의 세력을 구축했다.
특히 삼남 무이즈 앗다울라는 945년 서쪽의 이라크로 진출하여 바그다드에 입성했고,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대 아미르(أمير الأمراء|아미르 알 우마라ar) 칭호를 받아 이라크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바스 칼리파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잃고 종교적 상징으로만 남게 되었다. 부와이흐 왕조는 세 형제와 그 후손들이 파르스, 지발, 이라크 등 여러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는 연합 왕조의 형태를 띠었으며, 가문 내 최고령자가 전체 왕조를 이끄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왕조는 아두드 앗다울라의 통치 아래 파르스와 이라크가 통합되면서 가장 번성했으나, 그의 사후 왕족 간의 권력 다툼이 심해지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외부적으로는 자지라의 함단 왕조나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왕조 같은 세력의 침입으로 영토를 잃어갔다.
11세기 중반에는 튀르크계 맘루크 군인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왕조의 힘은 더욱 약화되었다. 결국 동쪽에서 새롭게 부상한 셀주크 왕조가 1055년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며, 1062년 파르스 지방에 남아있던 마지막 부와이흐 정권이 멸망하면서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2. 1. 기원과 건국 (934–945)
부와이흐(Buyid)라는 이름은 중세 페르시아어 이름으로, 축소형 ـویه|-ūyehfa (중세 페르시아어 ''-ōē'', 아랍어 ''-uwayh'')로 끝난다. 페르시아어식으로는 부야(Būya)라고 읽기도 하여 '''부야 왕조'''라고도 불린다.[1][2] 부와이흐 가문은 카스피해 남쪽 산악 지대인 데이람 출신으로, 처음에는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던 파나흐-호스로(Panah-Khusrow)의 후손이다.[3] 그의 아들 부야는 라히잔 출신의 어부였으나 후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4][5] 부와이흐 가문은 자신들이 사산 제국의 샤한샤(왕중왕) 바흐람 5세(재위 420년~438년)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6] 부와이흐 왕조는 시아파의 한 분파인 12이맘파를 신봉했다.[7]부야에게는 알리, 하산, 아흐마드라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함께 부와이흐 왕조를 세우게 된다.[8] 세 형제는 10세기 전반, 다일람인 보병 부대를 이끄는 군인으로서 이란 북서부 타바리스탄 지방을 지배하던 지야르 왕조 아래에서 활동하며 두각을 나타냈다.[9] 특히 장남 알리 이븐 부야는 처음에는 데일람족 군벌 마칸 이븐 카키의 군인이었다가,[10] 이후 지야르 왕조를 세운 마르다비지 휘하로 들어갔다.[11] 932년, 알리는 카라지를 봉토로 받아 독자적인 군사력을 키울 기반을 마련했다.[12] 그러나 마르다비지는 알리의 성장을 경계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고, 알리는 마르다비지 재상의 도움으로 이를 미리 알아차렸다.[13] 알리는 동생 하산, 아흐마드 및 400명의 데일람 지지자들과 함께 남쪽 파르스주로 피신하여 아라잔을 점령했다.[14][15] 이후 아바스 칼리파조의 장군 야쿠트(Yaqut)와 파르스 지방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으나 결국 승리하여[16] 934년경 파르스의 수도인 쉬라즈를 점령하고 이 지역에 부와이흐 왕조의 지배 기반을 확립했다.[17][18] 알리는 파르스의 유력 가문들과 동맹을 맺고 튀르크인 용병을 포함한 더 많은 병사를 징집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19]
알리는 동생 아흐마드를 케르만주 원정에 보냈으나 발루치족과 카프족(Qufs)의 저항으로 실패했다.[20] 한편, 지야르 왕조의 마르다비지는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를 몰아내고 조로아스터교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으며, 후제스탄주를 점령하고 알리에게 자신을 종주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21] 그러나 935년 마르다비지가 암살되면서 지야르 왕조가 혼란에 빠지자, 부와이흐 형제에게 세력을 확장할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22] 알리와 아흐마드는 후제스탄을 정복했고, 하산은 지야르 왕조의 수도였던 이스파한을 점령했으며, 943년에는 레이까지 점령하여 지발 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레이를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장남 알리는 파르스, 차남 하산은 지발, 삼남 아흐마드는 후제스탄과 케르만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나누어 다스리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삼남 아흐마드는 서쪽의 이라크로 방향을 돌려 945년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는 실권이 없던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무스타크피(al-Mustakfi)를 자신의 봉신으로 삼아 실질적인 통치권을 장악했으며, 칼리파로부터 라카브(칭호)를 받았다. 아흐마드는 '국가의 요새'라는 의미의 '''무이즈 앗다울라'''(معز الدولة|무이즈 알다울라ar) 칭호를 받았고, 동시에 알리는 '국가의 지원'이라는 의미의 '''이마드 앗다울라'''(عماد الدولة|이마드 알다울라ar), 하산은 '국가의 기둥'이라는 의미의 '''루크 앗다울라'''(ركن الدولة|루큰 알다울라ar)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로써 부와이흐 왕조는 파르스, 지발,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연합 왕조 체제를 구축했으며, 아바스 칼리파는 이라크에서 실권을 완전히 잃고 명목상의 종교적 수장으로 남게 되었다. 아흐마드(무이즈 앗다울라)는 대 아미르(أمير الأمراء|아미르 알 우마라ar)로 임명되어 이라크 지방의 세속 지배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2. 2. 전성기와 황금기 (945–983)
945년, 삼남 무이즈 앗다울라는 서쪽의 이라크 지방으로 진출하여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이라크 지방의 세속 지배권을 가진 대 아미르로 임명받았다. 이 사건 이후, 이라크 정권의 군주가 대 아미르 직위를 세습하게 되면서 칼리파는 이라크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이렇게 부와이흐 왕조는 세 형제와 그 자손들이 다스리는 파르스, 지발, 이라크의 3개 주요 정권과 그 외 여러 군소 정권으로 구성된 연합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왕족 중 최고령자가 부와이흐 가문의 가주로서 왕조 전체를 지휘하는 체제가 구축되었다.

무이즈 앗다울라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이즈 앗다울라가 이라크 정권을 계승했으나 바그다드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978년, 파르스 정권의 아두드 앗다울라에게 쫓겨나게 되었다. 아두드 앗다울라는 농업 생산력이 높은 파르스와 비옥한 이라크를 통합하여, 무이즈 앗다울라 사후 혼란스러웠던 이라크의 통치를 안정시켰다. 이 시기는 부와이흐 왕조의 최전성기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두드 앗다울라 사후에는 왕족 간 군주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격화되어 분열 경향이 깊어졌다.
2. 3. 쇠퇴와 멸망 (983–1062)
아두드 앗다울라의 죽음은 부와이흐 왕조 쇠퇴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그가 사망했을 때 바그다드에 있었던 아들 샴삼 알다울라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죽음을 비밀로 했으나, 결국 공표하고 '샴삼 알다울라'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아두드의 다른 아들 샤라프 알다울라가 그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내전이 발생했다. 한편, 쿠르드의 마르와니드 족장인 바드 이븐 두스탁이 디야르바키르를 점령하고 샴삼 알다울라에게 자신을 이 지역의 종속 통치자로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루쿤 알다울라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무아야드 알다울라도 이 시기에 사망했고, 그의 형제 파크르 알다울라가 사힙 이븐 아바드의 도움을 받아 그의 영토를 계승했다. 아두드 알다울라의 또 다른 아들 아부 타히르 피루즈샤는 바스라의 통치자로서 '디야 알다울라' 칭호를 얻었고, 아불 후세인 아흐마드는 후제스탄의 통치자로서 '타지 알다울라' 칭호를 얻었다.
샤라프 알다울라는 샴삼 알다울라로부터 오만을 빠르게 점령했고, 983년에는 샴삼 알다울라의 투르크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라크는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여러 반란이 발생했으나, 샤라프 알다울라는 이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가장 위험했던 반란은 아스파르 이븐 쿠르다와예가 바하 알다울라를 이라크 통치자로 세우려 했던 반란이었다. 같은 기간 동안 샴삼 알다울라는 바스라와 후제스탄을 점령하여 두 형제(디야 알다울라, 타지 알다울라)를 파크르 알다울라의 영토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결국, 자지라 지방(현 이라크 북부)의 함단 왕조나 아프가니스탄의 가즈나 왕조와 같은 외부 세력에 위협받아 영토가 침식되어 갔다. 11세기 중반 동안 부와이흐 아미라트는 점차 가즈나 왕조와 셀주크 투르크에게 잠식되었다. 1029년, 레이에서 자신의 데일람 군대의 봉기에 직면한 마지드 알다울라는 가즈나의 마흐무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흐무드는 도착하여 마지드 알다울라를 폐위시키고 가즈나 왕조 총독으로 교체하며 레이에서 부와이흐 왕조를 종식시켰다.
11세기 중반이 되자 이라크 등의 지배권은 튀르크계 맘루크들에게 넘어가고, 부와이흐 왕조는 거의 형해화되었다. 동쪽에서 가즈나 왕조를 대신하여 세력을 확대한 셀주크 왕조가 나타나, 1055년 투그릴 베그가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아바스 칼리파의 명목상 지위를 유지한 채 부와이흐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를 몰아냈다.[8] 1062년, 파르스 지방의 마지막 부와이흐 왕조 정권이 케르만에서 멸망하면서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3. 정치와 제도
부와이흐 왕조는 이라크와 서부 이란에 걸쳐 여러 공국이 연합한 형태의 정권이었다. 주요 공국은 시라즈를 수도로 하는 파르스, 라이를 수도로 하는 지발,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는 이라크에 기반을 두었다. 말기에는 더 많은 공국이 형성되기도 했다. 왕위 계승은 세습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통치자들은 자신의 영지를 아들들에게 분할하여 물려주었다.
부와이흐 통치자들이 사용한 칭호는 "총독" 또는 "공작"을 의미하는 ''아미르''였다. 일반적으로, 아미르들 중 한 명이 다른 사람들보다 선임으로 인정받았고, 이 사람은 ''아미르 알-우마라'', 즉 선임 ''아미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비록 선임 ''아미르''가 부와이흐 왕조의 형식적인 수장이었지만, 그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아미르국 밖에서는 어떤 실질적인 통제력도 가지지 못했으며, 각 아미르는 자신의 영토 내에서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누렸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일부 더 강력한 ''아미르''는 사산 왕조의 ''샤한샤'' 칭호를 사용했다. 또한 ''말리크''("왕") 및 ''말리크 알-물루크''("왕 중의 왕")과 같은 다른 여러 칭호도 부와이흐 왕조에서 사용되었다.
945년 무이즈 앗다울라가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로부터 이라크 지역의 세속적 지배권을 인정받고 대 아미르로 임명되면서, 이라크 정권의 군주가 대 아미르 직위를 세습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칼리파는 실권을 잃고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다. 부와이흐 가문은 시아파의 12이맘파를 신봉했지만, 수니파가 다수인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수니파 칼리파를 보호하고 그로부터 대 아미르 지위를 받아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루쿤 앗다울라, 무이즈 앗다울라 등 군주들의 칭호('다울라'는 아랍어로 '왕조'를 의미)는 칼리파가 왕조를 지탱하는 자로서 지배권을 승인하며 부여한 것이었다. 또한, 사산 왕조의 후예임을 주장하며 샤한샤 칭호를 사용하는 등 이란적 정통성을 내세우기도 했다.
왕조는 기본적으로 창건자 세 형제와 그 후손들이 파르스, 지발, 이라크 등 여러 정권을 나누어 다스리는 동족적 연합체였으며, 이론적으로는 가문 내 최고 연장자가 전체를 지휘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파르스 정권과 이라크 정권이 왕조의 주도권을 놓고 자주 대립했다. 특히 대 아미르로서 칼리파의 보호권을 행사하며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이라크 정권과, 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던 파르스 정권 간의 경쟁은 연합 정권의 구조적 약점이었으며, 이는 왕조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군사력 유지를 위한 재정 확보 방식으로, 무이즈 앗다울라는 946년 바그다드 정복 후 군인들에게 특정 토지의 세금 징수권을 부여하는 이끄따제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이후 이슬람 세계에서 널리 채택되어 군사 및 징세 제도의 기본이 되었다. 하지만 부와이흐 왕조 시기에는 이끄따 제도가 미비하여 징수할 세금의 한도액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이끄따 보유자들이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고, 이는 농촌의 황폐화를 초래하여 결국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4. 군사
부와이흐 왕조 초기의 군대는 주로 왕조의 기반이 된 데일람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용맹하며 주로 농민 출신으로 보병으로 복무했다. 데일람족은 사산조 시대부터 군사 활동의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이란과 이라크는 물론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에서 용병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전투 시 데일람족 병사들은 보통 칼, 방패, 창 3개를 소지했으며, 뚫기 어려운 강력한 방패 대형으로도 유명했다.
부와이흐 왕조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기존 압바스 왕조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튀르크족을 기병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9] 이로 인해 부와이흐 군대는 데일람족 외에도 튀르크족, 쿠르드족 등 다양한 민족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종교적으로도 데일람족은 주로 시아파 무슬림이었던 반면, 튀르크족과 쿠르드족은 수니파 무슬림이었다. 다만, 지발 지역의 부와이흐 군대는 여전히 데일람족이 주를 이루었다.
군대 내에서는 데일람족과 튀르크족 사이에 지배력을 놓고 자주 갈등이 발생했다. 부와이흐 아미르들은 병사들에게 보상을 제공하기 위해 특정 지방의 세금 징수권을 부여하는 이끄따(iqtāʾ) 제도를 활용하거나 현물 지급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10] 지역적으로는 이라크에서는 튀르크족이, 이란에서는 데일람족이 더 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5. 종교
부와이흐 왕조는 카스피해 남안의 산악 지대 데이람 출신으로, 당시 대부분의 데일람인처럼 시아파를 따랐다. 일반적으로 12이맘파(이맘파)를 숭상했다고 알려져 있지만[15], 초기에는 자이드파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11][20] 부와이흐 가문은 시아파 초대 이맘인 알리의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알리 가문 출신의 이맘을 내세워야 하는 자이드파보다는 은폐된 이맘을 믿는 12이맘파가 정치적으로 더 유리했을 수 있다.[12]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여, 부와이흐 왕조는 신하들에게 특정 종교적 견해를 강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다수의 수니파 신도를 의식하여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를 명목상 종교 지도자로 유지했지만, 실질적인 세속 권력은 모두 장악했다.[13] 또한,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긴장이 정부 기관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때때로 기독교도를 고위직에 임명하기도 했다.[14] 부와이흐 왕조는 종교 교리 자체보다는 종교의 정치적 측면에 더 관심을 두었으며, 다양한 종파(자이드파, 수니파, 조로아스터교 등)와 민족(다일람인, 투르크인, 쿠르드인)으로 구성된 지배 기반의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부와이흐 왕조는 시아파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덕분에 이전까지 개인 집에서 숨어서 행해지던 후세인 순교 추모 행사나 가디르 쿰 축제와 같은 12이맘파의 종교 활동을 공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시아파 학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져, 쿨라이니, 이븐 바바웨이, 셰이크 투시 등이 중요한 하디스 전승서를 편찬하고, 시아파 법학(자파리 법학파)이 체계화되는 등 학문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 바그다드 등지에서는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교적 갈등이 민중 수준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시아파가 공개적으로 축제를 열자 수니파도 이에 맞서 무스아브 이븐 주바이르의 묘소 참배나 아부 바크르 관련 행사를 열며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22] 그러나 이러한 종파 간 대립은 부와이흐 왕조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갈등이 왕조 성립 이후 표면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부와이흐 왕조가 수니파 아바스 칼리파를 유지하고 12이맘파를 선택한 것은 당시 국제 정세와도 관련이 있다. 동쪽의 비잔틴 제국의 위협과 서쪽의 이스마일파 파티마 왕조의 팽창 속에서, 부와이흐 왕조는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자이드파나 파티마 왕조(이스마일파)와 손잡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정치색이 옅은 12이맘파를 지지하면서 아바스 칼리파를 명목상으로 내세우는 것이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는 부와이흐 왕조의 현실주의적인 외교 및 종교 정책 노선을 보여준다.
6. 문화
부와이흐 왕조는 사만 왕조와 달리 다리어(신 페르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지 않았다. 대신 아랍어가 왕국의 공용어 역할을 했고, 중세 페르시아어는 때때로 보조 궁정 언어로 사용되었다. 부와이흐 왕조는 이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어 사용을 지원하여 서신뿐만 아니라 시에도 아랍어를 사용했다. 궁정에는 아랍인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 문인들도 모여 아랍어로 뛰어난 문학 작품들을 창작했다.
부와이흐 왕조가 신 페르시아어 사용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않은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역사가 에드먼드 헤르지그와 사라 스튜어트는 세 가지 요인을 제시한다. 첫째, 부와이흐 왕조가 바그다드 체류 경험으로 인해 아랍어 표기의 중요한 지지자가 되기를 원했을 수 있다. 둘째, 파르스와 같은 지역에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여전히 중세 페르시아어로 글을 썼기 때문에 신 페르시아어 사용이 억제되었을 수 있다. 셋째, 신 페르시아어가 서부 이란의 방언과 상당히 달라 동부 이란에서 주로 환영받았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페르시아어는 부와이흐 왕조 궁정에서 시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아부 무함마드 만수르 이븐 알리 알만티키 알라지, 후스라위 사라크시, 아부 자이드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가다이리 알라지 등 많은 저명한 시인들이 신 페르시아어로 작품을 남겼다. 페르시아 출신 재상 사히브 이븐 아바드(995년 사망)는 라에 있는 부와이흐 왕조 궁정의 주요 인물로서 자신의 모국어 대신 아랍어만을 사용했지만, 자신에게 헌정된 신 페르시아어 찬사는 받아들였다.
부와이흐 왕조는 또한 지역 서부 이란어로 작곡된 시, 즉 '파흘라비야트'의 사용을 장려했다. 조로아스터교와 기독교 인구가 상당수 존재했기 때문에,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 작성된 많은 기록은 중세 페르시아어, 시리아어, 아랍어로 구성되었다.
부와이흐 왕조를 세운 형제들은 알리, 하산, 아흐마드와 같은 아랍식 이름을 사용했지만, 2세대부터는 카므라바, 마르주반, 바흐람, 쿠스라우와 같은 전통적인 이란식 이름을 주로 사용했다. 이는 이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부와이흐 왕조는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의 유적인 페르세폴리스에 많은 비문을 남겼는데, 이는 그들이 이곳을 신화 속 이란 왕 잠시드가 건설했다고 믿으며 숭배했음을 시사한다. 아두드 알다울라는 고대 이란 축제인 사데와 메흐레간을 기념했으며, 이전의 많은 이슬람 통치자들처럼 노루즈도 기념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노루즈를 모델로 삼아 파나 쿠스라우-기르드 마을에서 매년 기념하는 두 개의 새로운 축제를 만들기도 했다.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는 "이란샤흐르"(이란)라는 개념이 지리 저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저술은 대부분 이란 작가들이 아랍어로 작성했다. 10세기 후반의 지리학자 이스타크리는 "가장 잘 경작되고(''ma‘mur''), 가장 아름답고 비옥하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세계의 부분은 이란샤흐르 왕국이다."라고 기록하며 이란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헤르지그와 스튜어트는 부와이흐 왕조 시대의 이란 정체성에 대해, 통치자들이 계보, 칭호, 페르세폴리스에 대한 경의 등을 통해 이슬람 이전 이란의 과거와 연결되려는 경향을 보였으며, 동시에 이란인들 사이에서도 '이란샤흐르'의 일원으로서 높은 수준의 자긍심이 존재했다고 평가했다.
부와이흐 왕조의 지배 아래에서는 관개 시설 건설과 농업 개발 같은 대규모 건설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국가 수입 증대에 기여했다. 특히 바리디나 하마단 왕조와 같은 다른 지역 통치자들에 비해 부와이흐 왕조는 건설 사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무이즈 앗다울라가 이라크에 도착했을 당시, 바그다드를 둘러싼 지역 분쟁으로 인해 국토가 황폐해져 있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루파일 강의 바두리야 댐이 복원되었고, 그 결과 빵과 같은 기본적인 식료품 가격이 안정되어 사람들이 바그다드로 다시 모여들게 되었다.
대부분의 주요 건설 및 복원 사업은 아두드 앗다울라의 통치 기간에 이루어졌다. 그의 통치 하에 시라즈는 인구가 크게 늘어 도시가 혼잡해지자, 그는 주둔군을 위한 특별 구역인 '파나 호스로-기르드'("파나 호스로가 만들었다")를 건설했다. 이는 사산 왕조의 왕들이 세운 도시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명칭이었다. 또한 피루자바드는 사산 왕조의 창건자 아르다시르 1세(재위 224년~242년)와 관련된 도시로 여겨졌는데, 아두드 앗다울라는 이곳을 개조하여 자신이 사산 왕조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지속적인 건축 프로젝트 중 하나는 나자프에 있는 알리의 무덤 위에 묘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7. 역대 군주
일반적으로 부와이흐 왕조 시대에는 파르스, 자발, 이라크를 통치하는 세 명의 강력한 아미르가 있었다. 때때로 한 통치자가 두 개 이상의 지역을 다스리기도 했지만, 세 지역 모두를 직접 통치한 부와이흐 왕조의 통치자는 없었다. 또한 부와이흐 왕조의 방계 가문이 세워지거나, 왕조 구성원이 특정 지역을 장악하여 통치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파르스의 부와이흐 왕조'''
군주 | 통치 기간 |
---|---|
이마드 알다울라 | 934–949 |
아두드 알다울라 | 949–983 |
샤라프 알다울라 | 983–989 |
샴삼 알다울라 | 989–998 |
바하 알다울라 | 998–1012 |
술탄 알다울라 | 1012–1024 |
아부 칼리자르 | 1024–1048 |
아부 만수르 풀라드 수툰 | 1048–1051 |
아부 사드 후스라우 샤 | 1051–1054 |
아부 만수르 풀라드 수툰 (복위) | 1054–1062 |
'''레이의 부와이흐 왕조'''
군주 | 통치 기간 |
---|---|
루크 알다울라 | 935–976 |
파크르 알다울라 | 976–980 |
무아이야드 알다울라 | 980–983 |
파크르 알다울라 (복위) | 984–997 |
마지드 알다울라 | 997–1029 |
'''이라크의 부와이흐 왕조'''
군주 | 통치 기간 |
---|---|
무이즈 알다울라 | 945–967 |
이즈 알다울라 | 967–978 |
아두드 알다울라 | 978–983 |
샴삼 알다울라 | 983–987 |
샤라프 알다울라 | 987–989 |
바하 알다울라 | 989–1012 |
술탄 알다울라 | 1012–1021 |
무샤리프 알다울라 | 1021–1025 |
잘랄 알다울라 | 1025–1044 |
아부 칼리자르 | 1044–1048 |
알말리크 알라힘 | 1048–1055 |
'''기타 지역'''
지역 | 군주 | 통치 기간 |
---|---|---|
바스라 | 디야 알다울라 | 980년대 |
하마단 | 무아이야드 알다울라 | 976–983 |
샴스 알다울라 | 997–1021 | |
사마 알다울라 | 1021–1024 | |
케르만 | 카와맘 알다울라 | 1012–1028 |
후제스탄 | 타지 알다울라 | 980년대 |
8. 가계도
- '''부와이흐''' (가문의 시조)
- * '''이마드 앗다울라''' (F1, S1)
- * '''루크 앗다울라''' (S2)
- ** '''아두드 앗다울라''' (F2, K2, I3)
'''샤라프 알다울라''' (F3, I5)
'''샴삼 알다울라''' (F4, I4, K3)
'''바하 알다울라''' (F5, K4, I6)
* '''술탄 알다울라''' (F6, I7)
** '''아부 칼리자르''' (F8, K6, I10)
*** '''알-말리크 알-라힘''' (F9, I11)
*** '''아부 만수르 풀라드 수툰''' (F10)
*** 아부 알리 파나-코스로우 (Abu Ali Fana-Khosrow)
* '''카와맘 알다울라''' (K5)
* '''무샤리프 알다울라''' (F7, I8)
* '''잘랄 알다울라''' (I9)
- ** '''무아야드 알다울라''' (SH1)
- ** '''파크 알다울라''' (SR1, SH2)
'''샴스 알다울라''' (SH3)
* '''사마 알다울라''' (SH4)
'''마즈드 알다울라''' (SR2)
- * '''무이즈 앗다울라''' (I1, K1)
- ** '''이즈 알다울라''' (I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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